기뻐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항상", 기도도 만만치 않은데 "쉬지 말고", 감사도 어려운데 "범사에(모든 것에)". 앞에 붙은 부사들이 문장 전체를 찍어 누르는 돌덩이처럼 다가옵니다. 설교하는 목사 자신에게도 무거운 부담이었습니다.
카페 뒷자리에서 우연히 듣게 된 어느 여성분의 전화 통화. 무려 두 시간 반을 쉼 없이, 안부에서 나라 걱정, 동남아 여행, 유럽,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남편 이야기까지 이어지던 통화의 마지막 멘트가 압권이었습니다.
"춘자야, 자세한 얘기는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
두 시간 반을 이야기하고도 '자세한 얘기'가 남아 있다는 것. 그 순간 본문이 풀렸습니다. 관계만 좋으면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답은 관계였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자꾸 시간(새벽에, 잠들기 전에)과 장소(교회에 와야)에 묶지만, 성경은 기도를 시간·장소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공통된 것은 하나, 관계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그 통화만큼 돈독하다면 두세 시간 기도도 순식간일 텐데, 우리는 20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감사도 같습니다. 33년 목회의 경험이 주는 답도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지구 반대편이 아닙니다. 원수와 함께라면 일본행 두 시간이 24시간 같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남미행 18시간도 순식간입니다. 거리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첫 번째 증인,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은 철저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배고픔과 아픔과 분노와 눈물을 그대로 지니시고도, 아버지와의 돈독한 관계 안에서 — 항상 기뻐하셨고(십자가의 고난조차 기쁨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셨고(기도할 '필요'가 없는 분이 겟세마네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 우리를 위한 모범), 범사에 감사하셨습니다(십자가를 앞둔 베다니의 축사, 오병이어의 열두 바구니와 이방 땅 칠병이어의 일곱 광주리 — 그 시작은 언제나 작은 도시락 앞의 감사). 인간으로 승리하셨다면,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가능합니다.
두 번째 증인, 데살로니가 교회. "예수님이니까 가능하지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받은 교회는 황제 숭배와 그리스-로마 신들의 도시에서 갓 개척된 초신자 교회였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가문에서 파문당하고 장사가 망하고 내일 순교해도 이상하지 않던 사람들이,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고난 중에 기뻐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철저하게 감사하며 신앙의 모델이 되었습니다(살전 1:6-7, 살후 1:3-4). 두 증인이 오늘 우리에게 외칩니다 — 가능하다고.
새가족 수료, 서리집사, 안수집사와 권사, 장로 — 세상 모든 것에는 졸업과 수료가 있지만, 기쁨과 기도와 감사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주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영원히 진행형(-ing)입니다. 혹서기와 방학으로 몸은 나태해질 수 있어도, 이 세 가지만은 중단 없이 — 어디에 계시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켜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