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에는 넓고 좋은 땅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버지와 형들을 굳이 고센 땅에 머물게 합니다. 거 참 이상합니다. 왜 자꾸 고센, 고센, 고센을 고집했을까요. 창세기 46장 34절은 이렇게 맺습니다.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첫째, 고센은 목축을 위한 최적의 실무적 장소였습니다. 바로 왕의 가축들도 관리되던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신앙은 생업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밥벌이가 이어질 땅을 먼저 예비하셨습니다.
둘째, 고센은 신앙 정체성을 지키는 거룩한 격리의 자리였습니다. 애굽 문화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 왕궁과 떨어진 곳을 택했습니다. 세상 한복판에 살되, 세상의 방식에 잡아먹히지 않을 만큼의 거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셋째, 고센은 가나안으로 돌아가기 위한 전략적 국경지대였습니다. 국경에 자리하였기에, 떠나야 할 때 지체 없이 약속의 땅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애굽은 잠시 머무는 곳이었지 정착할 본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고센은 어디입니까. 첫째,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입니다. 야곱처럼 우리도 세상에 살지만, 본향인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나그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빌립보서 3장 20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진짜 소속이 어디인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셋째, 거룩함으로 증명하는 정체성입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일터가 곧 고센입니다. 애굽의 경제 속에서 일하지만 애굽의 신을 섬기지 않는 자리, 거래하되 부정과 결탁하지 않는 자리, 언제든 하나님이 부르시면 짐을 꾸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애굽에 살되 애굽에 속하지 않는 사람 — 그가 하나님 나라의 사업가입니다.
케노시스는 헬라어로 비움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신 사건, 빌립보서 2장의 그 놀라운 하강입니다. 지난 1부가 비움의 신학을 배우는 시간이었다면, 오늘 2부는 그 비움을 살아 내는 길을 다룹니다. 나를 비우고 예수를 채우는 삶, 그것이 케노시스의 삶입니다.
케노시스의 삶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스스로를 비움입니다. 자신의 영광과 권위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뜻을 채우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부인입니다. 모든 판단과 행위에서 내가 우선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되는 삶입니다. 셋째,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편안하고 넓은 길이 아니라, 낮고 좁은 길을 기꺼이 선택하며 예수를 따르는 과정입니다.
비움과 채움은 하나의 원리입니다. 움켜쥔 손으로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물동이를 기울여 쏟아 낸 사람만이 빈 잔을 하늘로 들어 올릴 수 있고, 그 빈 잔에 성령의 빛이 부어집니다. 비움은 상실이 아니라 더 큰 채움을 향한 통로입니다.
역사는 케노시스를 산 사람들을 증언합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한센병 환자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고,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다미안 신부는 몰로카이 섬의 한센병 환자들과 온전히 하나 되기 위해 스스로 환자가 되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에콰도르에서 순교한 짐 엘리엇은 이렇게 남겼습니다.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비즈니스의 세계가 채움의 경쟁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경영은 비움의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자기 권리를 내려놓는 경영자, 자기 이름을 낮추는 일꾼, 자기 유익을 비우는 공동체 — 그 낮아진 자리를 하나님은 지극히 높이십니다. 일터가 곧 케노시스의 훈련장입니다.
누가복음 8장 1절에서 3절은 짧지만 놀라운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마을과 동네를 두루 다니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 그 사역을 배후에서 받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같은 여인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겼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이 2,000년 전의 경영 보고서, 곧 하나님 나라를 함께 경영하는 사람들의 원형입니다.
첫째, 비즈니스 현장이 곧 가장 거룩한 선교지입니다. 사역은 강단에서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재정과 인프라를 책임진 일터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복음이 흘러갔습니다. 당신의 사업장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경영되는 현장입니다.
둘째, 플랫폼이 아니라 네트워크입니다. 예수님은 한 곳에 사람을 모으는 중앙집중 방식이 아니라, 마을마다 직접 찾아가 만나는 살아 있는 네트워크로 일하셨습니다. 편안한 자리를 박차고 먼저 손을 내미는 동역, 비전을 공유하는 연합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셋째, 재정의 재정의입니다. 돈은 사랑하면 일만 악의 뿌리가 되지만, 하나님 나라의 전진을 위한 거룩한 연료로 쓰면 복이 됩니다. 요안나처럼 세상 시스템의 심장부에 머물면서 그 자원을 하나님 나라로 흘려보내는 당당한 투자자가 필요합니다.
지속되는 섬김의 루프, 곧 디아코눈입니다. 성경의 섬겼더라는 단어는 단회성 기부가 아니라, 자기들의 소유 곧 자산과 역량과 인맥을 매번 꾸준히 공급하는 무한 루프를 뜻합니다. 일터를 사명지로 바꾸는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함께 경영하는 왕국의 경영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36장, 에서의 족보입니다. 족보는 지루한 이름의 나열처럼 보이지만, 에서의 족보는 한 가정이 어떻게 세상과 뒤섞이며 세속화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의 기록입니다. 강의는 묻습니다. 과연 양다리 신앙이 가능합니까. 세상 반, 하나님 반의 삶이 가능합니까.
첫째, 에서의 족보는 혼합과 세속화의 기록입니다. 언약 밖의 족속, 곧 호리와 이스마엘과 가나안의 피가 끊임없이 섞여 들어옵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보다 정치적 동맹과 현실적 야합을 앞세웠습니다. 그 결과는 거룩한 구별이 아니라 세속적인 가나안화였습니다.
둘째, 그 혼합의 가장 쓴 열매가 아말렉입니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와 첩 딤나 사이에서 아말렉이 태어났습니다. 이 아말렉은 훗날 이스라엘을 가장 집요하게 괴롭힌 대적이 됩니다. 세상과의 야합은 달콤해 보이지만, 그 끝에서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치는 원수였습니다. 세속적 혼합의 결과물은 결국 분리와 투쟁이었습니다.
셋째, 성경은 처음부터 섞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레위기는 두 종류의 씨를 한 밭에 섞어 뿌리지 말고, 두 재료로 짠 옷을 입지 말며,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배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농경 규칙이 아니라 거룩, 곧 구별을 가르치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섞이지 않고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의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양다리 작전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을 동시에 붙잡는 삶에는 진정한 평안도, 참된 행복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그리스도인은 정결한 정체성을 가지고, 비즈니스의 현장에서도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부터 17절은 새 사람에 관한 선언입니다. 지식 안에서 새롭게 되어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입혀진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두순 목사는 묻습니다. 당신은 오늘 어떤 사람을 입고 출근하십니까. 이름표에 적힌 직함이 당신의 정체성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상속자의 정체성이 당신의 정체성입니까.
첫째, 낡은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단번의 결단이 아니라 매일의 갱신입니다. '지식 안에서 새롭게 되어' — 이 현재형 수동태는 날마다 계속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 기도 가운데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바로 새 사람을 입는 행위입니다. 직함이 아니라 부르심, 성과가 아니라 은혜가 나를 규정합니다.
둘째, 새 사람의 옷장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 이것이 상속자가 입는 옷입니다. 비즈니스 현장에서 이 옷은 어색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가 흐르는 기업 문화, 경쟁 대신 섬김이 살아 있는 조직이야말로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셋째, 골로새서 3장 17절의 결론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보고서 한 장, 거래처 통화 한 번, 직원과의 대화 한마디가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정체성이 일터의 언어를 바꾸고, 일터의 언어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만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오늘 그 상속자의 정체성을 입고 일터로 나아가십시오.
경영자는 고독한 전장에 서 있습니다. 모든 결정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는 한국의 CEO에게, 이 강의는 새로운 운영체제를 제안합니다.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모든 프로그램의 바탕이 되듯, 경영자의 마음에도 바탕이 되는 운영체제가 있습니다. 그 핵심은 한 문장입니다. 이 배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왕국 비즈니스, 킹덤 비즈니스는 바로 이 패러다임의 전환에서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자신을 세 개의 헬라어 단어로 소개합니다. 이 세 단어가 왕국 경영자 운영체제의 3단계입니다.
첫째, 휘페레테스. 의지의 내려놓음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배의 밑층에서 노를 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항로를 정하는 분은 선장이신 그리스도이시고, 나는 그분의 박자에 맞추어 노를 젓는 사람입니다. 키를 쥐고 있는 동안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그러나 주도권을 내려놓을 때, 역설적으로 평안이 찾아옵니다.
둘째, 디아코노스. 자원을 흘려보내는 사람입니다. 이 단어는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 곧 청지기를 뜻합니다. 내게 맡겨진 이익과 자원은 움켜쥐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웃에게로 흘려보내는 파이프가 되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고이면 썩고, 흐르면 살립니다.
셋째, 피스토스. 충성, 곧 관계 자본의 축적입니다. 하나님과 경영자와 직원과 고객 사이에 쌓이는 신뢰의 삼각형입니다. 충성스러운 한 번의 거래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관계 자본이 되어 쌓이고, 그것이 왕국 경영의 최종 결산서가 됩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이것이 왕국 CEO의 인사 평가 기준입니다.
2022년, 정상 고도를 순항하던 한 여객기가 갑자기 추락했습니다. 4년 만에 해독된 블랙박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기계의 고장이 아니라, 조종석에 앉은 한 사람의 어두운 마음이 부른 참사였던 것입니다. 강의는 여기서 묻습니다. 만약 그 조종석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었다면 어땠겠습니까. 그리고 질문은 우리에게로 향합니다. 내 인생과 내 사업의 조종석에는 지금 누구의 마음이 앉아 있습니까.
빌립보서 2장 5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마음이 바로 케노시스, 자기 비움입니다.
첫째, 자기 비움은 포기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신적 영광과 독립적인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으시고, 종의 형체를 입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비움은 상실이 아니라 사랑의 선택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거룩한 하강입니다.
둘째, 그 하강의 가장 낮고 거룩한 지점은 십자가였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인간이 도저히 넘을 수 없던 죄의 담을, 주님은 자기 육체로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내려가는 길이 곧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셋째, 일터의 질문입니다. 강인가, 경쟁자인가. 영어로 리버인가 라이벌인가. 같은 강물을 함께 나누면 동역자가 되고, 서로 차지하려 다투면 경쟁자가 됩니다. 자기를 비우는 사람만이 일터를 강처럼 흐르게 합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언젠가 우리 마음의 블랙박스가 해독되는 날이 옵니다. 그날 십자가는 그 모든 기록을 이미 사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기업인이 새벽에 무릎을 꿇고 물었습니다. 주님, 저도 해당됩니까. 사도도 아니고 목회자도 아닌 저의 비즈니스가, 주님의 일터가 될 수 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요한복음 14장 12절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 약속은 사도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 아침 일터로 출근하는 모든 믿는 자의 것입니다.
첫째, 더 큰 일의 비밀입니다. 더 큰 일은 더 화려한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와 유대 땅을 걸으셨지만, 승천하신 주님과 동역하는 우리를 통해 복음은 온 세상의 일터로 확장됩니다. 규모와 범위에 있어서 더 큰 일입니다. 당신의 사무실과 공장과 매장이 바로 그 현장입니다. 일터가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독점적 대리권의 부여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는 단순한 주문이 아니라 법적인 대리권이며 절대 보증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가지고 비즈니스와 일터를 그리스도께 연결하는 공식 대리인입니다. CBMC라는 이름이 바로 그 뜻입니다. 비즈니스와 마켓플레이스를 그리스도께 연결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그렇다면 오늘 회사로 돌아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거창한 목표가 아닙니다. 직원 한 사람에게 진심 어린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입니다. 수고했다는 말, 고맙다는 말,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 그 따뜻한 약속의 한마디가 하나님의 장부에 기록되는 더 큰 일의 시작입니다. 기도가 능력이 되고, 일상이 사역이 됩니다.
흉년의 땅에서 이삭은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축복은 곧 위기가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형통을 시기하여 우물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복을 받은 사람이 세상의 반작용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삭의 우물 이야기가 그 답을 줍니다.
첫째, 축복이 불러온 위기입니다. 백 배의 결실 뒤에 시기가 따라왔습니다. 형통의 계절은 동시에 시험의 계절입니다. 사업이 잘될 때가 사실은 영적으로 가장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성공의 정점에서 무너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때 깨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에섹과 싯나를 지나 르호봇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삭은 첫 우물을 빼앗기자 다투지 않고 옮겨가서 다시 팠습니다. 그 우물의 이름이 에섹, 다툼입니다. 두 번째 우물도 빼앗겼습니다. 그 이름은 싯나, 대적입니다. 그래도 이삭은 싸우지 않고 또 옮겨 팠습니다. 마침내 아무도 다투지 않는 넓은 곳에 이르렀고, 그 우물의 이름이 르호봇, 넓은 곳입니다. 양보는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넓은 곳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셋째, 신뢰의 양보가 만드는 선한 영향력입니다. 손해 보는 듯한 결정의 뒤에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가 있습니다. 다툼 대신 양보를 선택하는 비즈니스맨을 보며 세상은 마침내 고백하게 됩니다. 이러니 어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하지 않겠는가. 결국 블레셋의 왕이 먼저 찾아와 화친을 청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을 인정하는 순간입니다.
강의는 뜻밖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옛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관상은 면상보다 못하고, 면상은 심상보다 못하다. 결국 얼굴 생김새보다 마음의 모양, 심상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마음이 얼굴이 되고, 마음이 말이 되고, 마음이 인생이 됩니다.
그렇다면 비즈니스맨의 마음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뜻밖에도 결핍이 아니라 풍요입니다. 이것이 풍요의 저주입니다. 배고플 때는 간절히 기도하지만, 배부르면 내 손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고 믿는 인간의 자기 중심성입니다. 예레미야 5장에서 하나님은 탄식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나를 버렸다고 말입니다.
역사가 증언합니다. 역사상 가장 풍요로웠던 로마는 결핍이 아니라 과잉 속에서 무너졌습니다. 소돔의 죄악도 가난이 아니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에서 자랐다고 에스겔은 기록합니다. 풍요 그 자체가 아니라, 풍요를 다루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사업의 성공 곡선이 가장 높은 지점이, 영적으로는 가장 위험한 지점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은 비움과 참된 채움입니다. 빌립보서 2장의 케노시스, 곧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2장이 말하는 플레로마, 참된 충만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소유의 충만은 결국 마르지만, 그리스도의 충만은 흘러넘쳐 이웃을 살립니다.
부활의 첫 저녁,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 닫힌 문을 통과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첫 마디는 책망이 아니라 평강이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실패하고 도망쳤던 사람들에게 주님은 평강을 먼저 주십니다. 오늘 일터에서 두려움의 문을 닫아건 우리에게도 같은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평강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것이 파송입니다. 숨어 있던 방이 선교의 출발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일터가 바로 그 보내심을 받은 자리입니다. 교회 문을 나서는 월요일 아침이 파송예배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보내심에는 반드시 능력이 함께 주어집니다.
사도행전 17장 6절에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 일행을 가리켜 이렇게 외쳤습니다. 천하를 어지럽히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렀다. 세상을 뒤집어 놓는 사람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권력이나 재물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보내심을 받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변화되면 세상이 변화됩니다.
당신의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거래처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일터는 생계의 자리가 아니라 파송의 자리입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보내심을 믿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